본문 바로가기

소소한 일상

썩은 당근에게 받는 소소한 기쁨

약 9개월 전 백수 시절,

침대와 하나 되어 먹방&게임 유튜브 영상에 빠져 피둥피둥 살이 오르던 달이 있었다.

눈과 귀와 입에 부족한 것 없이 양껏 충족되는 생활에 마음이 여유로워진 달은 '집밥'에 빠졌었다.

왜냐 하면 그때 승우아빠, 백종원의 요리비책, 각종 먹방 ASMR 등 음식을 컨텐츠로 한 영상들이

단지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행위가 매우 흥미 있고, 재미있고, 맛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뭘 그리 새삼스럽게 표현하느냐 할 수 있겠지만..

 

달은 학교에서 요리를 전공했었다.

요리를 해봤고 어떻게 맛을 내는지 대강 감이 오니까 음식에 대한 환상이 없다.

그리고 한 때 폭식증에 걸려서 각종 먹고 싶은 음식을 양껏 먹어봤던 기억도 있어서,

아무리 맛이 있어도 맛의 한계치가 가늠되기도 하고 음식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지도 않다.

백선생님이 아직도 음식을 좋아하고 맛있게 먹는 걸 보면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튼, 백수 시절 달은 돈도 없으면서 비싼 채소 무서운 줄 모르고 종류별로 준비해뒀었다.

각종 레시피를 따라 하려면 채소가 다양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재미있고 맛있어 보이던 영상 속 음식은 역시나 현실의 자취생 음식이 되어 곧 흥미를 잃었다.

 

그 이후 직장을 잡고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달은 적어도 8개월은 족히 열어 보지 않았던 냉장고 채소 칸이 떠올랐다. 

폭발물 처리하듯 살포시 열어 본 채소 칸에서 곤죽이 된 연근과 가지, 오이가 녹갈색이 되어 달을 반겼다.

그리고 생각보다 생생한 주황빛의 당근 정말 신선해 보이고 단단한 당근이었다.

(물론 뿌리 끝 3센티 정도는 마르면서 흰 곰팡이가 펴 있었다)

 

당근은 어째서 이렇게 멀쩡하지? 라고 생각했으나, 먹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른 채소들처럼 그냥 버릴 까 하다가, 먹어볼 까 싶어 일주일 정도 더 냉장고에 뒀다

가 결국 안 먹을 것 같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너무너무 선명한 주황빛과 파릇한 잎이 약간의 죄책감을 일으켰다.

미안한 마음에 어릴 적 초딩 과학? 실과? 실습시간에 했던 양파, 감자, 당근, 무 등등 수경 재배가 떠올라

윗둥을 잘라 대충 물에 담가줬다. 그리고 3일 정도 지났을까?

 

잎사귀 0.5cm도 안됐었다.

당근의 생존력이란.. 어마어마하다.

이래서야 정말로 버리기 힘들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폭풍 성장하는 당근 잎이 정말 신기하다.

어디까지 자라려나? 궁금하고 기대하며 하루하루 지켜보는 것이 요즘의 즐거움이다.

매일 이 기쁨을 구름이 와 나누고 있는데, 구름이는 당근을 먹으라는 의미로 알아듣는 것 같다.

 

(어쩌라는거냐 인간..)

 

 

뭘 하고 사는 건지, 왜 살아야 하는 건지,

잘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정하다고 느껴지는 요즘의 달이다.

겨우 썩은 당근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보면서 힘을 얻을 정도라니

참으로 메마른 삶을 살고 있었나 보다.

숫자를 쫓고 맞춰가는 생활에 지쳐가던 찰나였다.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나온 길과 똑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만든 블로그.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어서,

구름이(개)와 달(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어서 만든 새벽 감성 블로그.

곰팡이 피고 메말라 곤죽이 되지않기 위해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썩은 당근처럼 초록 잎을 틔우고 싶다.